기념관 로비는 경기도 문화유산 해설사 2명이 상주하여, 기념관 안내 및 전시물 등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로 관람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1919년 화성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4월 15일 일본군경에 의한 제암ㆍ고주리 학살, 유가족들의 증언, 그 후의 기록들을 사진패널과 유물, 인터뷰 영상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을 기억하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유족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암리·고주리의 이야기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서 학살을 당한 순국선열의 유해가 가마니에 담겨 4km 떨어진 향남면 도이리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매장되었습니다. 그 후 1982년 9월 21일부터 8일 간에 걸쳐 사건의 목격자이자 유가족인 전동례 할머니와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해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제암교회는 기념관 뒤편에 묘역 부지를 제공하고 1982년 9월 29일 유족측과 경기도 당국, 문화공보부, 제암리 순국선열 추모사업회 등 관련단체와 함께 위령제를 거행하고 23인의 합장묘소를 마련하였습 니다.
이 탑은 1959년 4월 22일 제암교회 터에 세워졌으나 이후 정부의 3·1운동 유적지 정화사업에 의해 현재 기념관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기미년 삼월일일 일본의 말굽아래 십년간 잠들었던 민족의 분노는 활화산 터지듯 일어나 삼일독립운동이 선언되자, 노도 같은 백의민족의 자유를 부르짓는 백수 항전의 드높은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만길 불꽃을 올렸다. 죽음 아니면 자유를 달라 서리 같은 총칼을 든 일본 헌병 앞에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리 같은 일본 헌병은 칼과 총으로 백의민족을 난도질쳤다.
경기도 화성은 역사 깊은 문화의 도시였다. 여기에 향남면 제암리 두렁바위 농가 사십호는 가난했으나 정신문명의 수준이 높았다. 동리 안에는 기독교 예배당이 있고, 뜻있는 청년들은 예배당 안에서 나라 찾을 것을 항상 기도드렸다. 삼일운동이 터지자 그들은 봉화를 높이 들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독수리 같은 일정은 이들의 행동을 노렸다.
마침내 음력 삼월십육일 오후 한 시경 일경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하여 청년 이십일명과 여인 이명 도합 이십삼명을 무기로 위협하여 예배당에 감금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뒤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두렁바위를 사를 듯 하늘에 뻗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척으로 사라진 채 예배당은 한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이어 일경은 다시 고주리로 가서 주모인사로 지목된 천도교인 육명을 결박하여 나무더미에 세워 총살하고 불을 질렀다. 만고에 없는 일경의 잔인무도한 행동이었다. 스물아홉분의 순국열사는 이렇게 푸른 죄를 불속에 뿌려 겨레의 넋을 지켰다. 오늘 자주독립 국가를 찾은 두렁바위 사람들은 순국열사의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영원히 이 사실을 전하려 당시 피화처였던 예배당 터에 정성을 모아 아담한 기념탐을 세운다.
전면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쓰시다. 월탄 박종화 짓고, 여초 김응현 쓰다.
안정옥 안종린 안종락 안종환 안종후 안진순 안봉순 안유순 안종엽 안필순 안명순 안관순 안상용 조경칠 강태성 동부인김씨 홍원식 동부인김씨 홍순진 김정헌 김덕용 안무순 안경순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김주남 김주업 김흥복
3·1독립만세운동으로 무참히 학살된 순국선열 23명의 넋을 기리고 자주독립 의지를 계승하기 위하여 이곳에 설치하였습니다.
23개의 크고 작은 돌기둥은 순국선열들의 혼을 담은 추모비이며, 높이 솟은 기둥은 무한한 발전과 자유를, 기둥의 원
(O)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1995년 12월
화성시에서 세우다
3·1운동정신교육관은 화성지역 독립운동과 정신에 대하여 지역사회와 학교를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제암교회가 불탔던 참상의 현장으로 향남면 3·1운동 순국기념관 건립위원회에서 1959년 4월 22 일 건립한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이후 제암리 3·1운동 유적지 정화사업을 수행하면서 원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다시 규모를 크게 하여 1983년 4월 15일 이 비를 세웠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에서 의학자·선교사로 일하다가,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을 외국에 알리고, 일제만행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습니다.